안티오키아의 에프스타티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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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티오키아의 에우스타티오스는 4세기 인물로, 터키 팜필리아의 시데 출신으로 320년경 알레포의 주교였으며,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직전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아리우스파에 반대하며 니케아 신조 형성에 기여했으나,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를 비난한 것이 다른 주교들의 반감을 사 330년 시노드에서 사벨리우스파로 낙인찍혀 해임되었다. 트라키아의 트라야노폴리로 추방되어 사망했으며, 그의 지지자들은 멜레티우스 분열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의 유일한 완전한 저작은 '오리겐 반대 엥가스트리미토'이다.
터키 팜필리아의 시데 출신인 에우스타티오스는 320년경 시리아 알레포의 주교를 지내다가,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직전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에 대한 강력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며 니케아 신조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 그는 마르켈루스, 알렉산데르와 협력하여[3][4] 신조 내용에 영향을 미쳤다.[5]
에프스타티오스의 저작 중 현재까지 완전하게 전해지는 것은 오리겐을 비판하는 내용의 ''De Engastrimytho contra Origenemlat''이 유일하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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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 생애
그러나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를 비롯한 아리우스파와의 신학적 갈등은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에우스타티오스는 동방의 다른 주교들 사이에서 점차 고립되었다. 결국 330년 안티오키아에서 열린 시노드(교회회의)에서 사벨리우스파로 지목되어 해임되었으며,[6] 이 결정은 황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확정되었다.[2] 그는 니케아 신조를 지지하다가 해임되거나 추방된 여러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7][10]
해임 후 에우스타티오스는 트라키아의 트라야노폴리로 추방되었고,[11] 그곳에서 사망했다. 사망 시기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략 337년경 또는 늦으면 370년경으로 추정된다.[12] 그의 사후에도 그를 따르던 이들(에우스타티우스파)은 후임 주교인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우스를 인정하지 않아 멜레티우스 분열이라는 교회 내 분열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원인이 되었다.[13]
에우스타티오스의 저작 중 현재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는 것은 오리겐을 비판한 ''De Engastrimytho contra Origenem|엥가스트리미토에 관하여lat''가 유일하다.[15]
2. 1. 초기 활동
터키 팜필리아의 시데 출신이다. 320년경 시리아 알레포의 주교를 지냈으며,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열리기 직전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가 되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에우스타티오스는 아리우스파에 맞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1] 그는 마르켈루스, 알렉산데르와 협력하여[3][4] 니케아 신조의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5] 다만, 그가 작성했다고 알려진 ''황제에게 보내는 연설(Allocutio ad Imperatorem)''은 실제 그의 저작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2]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도 에우스타티오스와 아리우스파 및 에우세비우스 지지자들 사이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에우스타티오스는 아리우스파를 강하게 비판하며 특히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를 직접적으로 공격했는데, 이는 동방의 다른 주교들 사이에서 그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논쟁의 핵심은 단순히 아리우스의 신학을 넘어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라는 용어의 해석 문제로 옮겨갔다.[8]
교회 역사가 소조멘은 이 시기의 논쟁이 아리우스 자체보다는 '호모우시오스'의 정확한 의미에 집중되었다고 기록했다. 일부는 이 용어가 아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몬타누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의 오류를 포함한다고 여겼다. 에우스타티오스는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가 니케아 공의회에서 확립된 교리를 바꾸려 한다고 비난했고, 에우세비우스는 자신은 니케아 교리를 모두 인정한다면서 오히려 에우스타티오스가 사벨리우스주의에 빠졌다고 맞섰다.[9]
결국 이러한 갈등 속에서 330년 안티오키아에서 열린 시노드(교회회의)는 에우스타티오스를 사벨리우스주의자로 규정하고 해임했다.[6] 이 결정은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에 의해 확정되었다.[2] 실제로 니케아 공의회 이후 10년 안에 신조를 지지했던 주요 인물 대부분이 해임되거나 추방되었는데, 에우스타티오스도 그중 한 명이었다.[7]
에우스타티오스가 해임되자 안티오키아의 지지자들은 강하게 반발하며 무력 사용까지 고려했으나,[11] 에우스타티우스는 이를 만류하고 신앙을 지킬 것을 당부하며 여러 성직자와 함께 추방길에 올랐다. 그는 트라키아의 트라야노폴리로 추방되었다.[12]
2. 2. 니케아 공의회와 아리우스파 논쟁
터키 팜필리아의 시데 출신인 에우스타티오스는 320년경 알레포의 주교를 지내다가,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열리기 직전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가 되었다. 이 공의회에서 그는 아리우스파에 맞서 열정적으로 반박하며 두각을 나타냈다.[1] 니케아 공의회에서 그는 마르켈루스, 알렉산더와 협력하여[3][4] 니케아 신경의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5]
에우스타티오스는 특히 아리우스파의 주요 인물인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를 강하게 비판했는데, 이는 동방의 다른 주교들 사이에서 그의 입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330년 안티오키아에서 열린 시노드(교회 회의)에서 그는 사벨리우스파라는 이단으로 몰려 해임되었고,[6] 이 결정은 황제에 의해 확정되었다.[2]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도 에우세비우스파(아리우스파에 동조적인 주교들)와 친(親)니케아파 사이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실제로 "니케아 공의회 후 10년 이내에 그 공의회의 신조를 지지하던 모든 주요 인물들이 해임되거나 불명예스럽게 되거나 추방되었다." 에우스타티우스 역시 이러한 탄압의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7] 이때 논쟁의 핵심은 아리우스 개인이나 그의 신학 자체보다는[8] 'ὁμοούσιος|호모우시오스grc'(동일본질)라는 용어의 해석 문제로 옮겨갔다.
5세기 교회 역사가 소조멘은 이 시기 논쟁이 아리우스가 아닌 '호모우시오스' 용어의 의미에 집중되었다고 기록했다. 일부 주교들은 이 용어가 성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몬타누스와 사벨리우스의 오류를 답습한다고 여겼다. 에우스타티오스는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가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왜곡한다고 비난했고, 에우세비우스는 자신은 니케아 교리를 모두 인정한다면서 오히려 에우스타티오스가 사벨리우스주의에 빠졌다고 맞받아쳤다.[9]
결국 에우스타티오스는 안티오키아 시노드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해임되었다.[10] 안티오키아의 지지자들은 이에 격렬히 반발하며 무력 사용까지 고려했지만,[11] 에우스타티우스는 그들을 만류하고 믿음을 지킬 것을 당부하며 추방길에 올랐다. 그는 트라키아의 트라야노폴리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사망했는데, 사망 시기는 337년경으로 추정되나 370년까지 살았을 가능성도 있다.[12] 에우세비우스파는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를 후임 주교로 추천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에우스타티오스가 죽은 후에도 그의 추종자들(에우스타티우스파)은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우스가 360년 안티오키아 주교로 선출되고 362년 알렉산드리아 시노드에서 승인된 후에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의 강경한 태도는 정통파 내부에 분열을 일으켰고, 이는 5세기 초까지 지속된 소위 멜레티우스 분열로 이어졌다.[13][14]
에우스타티오스의 저작 중 현재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은 오리겐을 반박하는 ''De Engastrimytho contra Origenem|엥가스트리미토에 관하여lat''가 유일하다.[15]
2. 3. 해임과 유배
에프스타티오스가 아리우스파를 반박하며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를 비판하자 동방 주교들 사이에서 입지가 좁아졌다. 결국 330년 안티오키아에서 열린 시노드(종교회의)에서 사벨리우스파라는 비난을 받고 해임되었으며,[6] 이 결정은 황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확정되었다.[2]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도 니케아 신조를 지지하는 이들과 에우세비우스파 사이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니케아 공의회 후 10년 안에 신조를 지지했던 주요 인물 대부분이 해임되거나 추방되었는데, 에프스타티오스도 그중 하나였다.[7] 이때 논쟁의 핵심은 아리우스의 신학 자체보다는[8]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라는 용어의 해석 문제였다.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를 중심으로 한 에우세비우스파는 '호모우시오스'가 로고스가 아버지의 일부이며 실질적 구분이 없다는 사벨리우스파적 의미를 내포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에프스타티오스는 오리겐을 따르는 에우세비우스가 니케아 신조에서 벗어났다고 비판했다. 5세기 교회 역사가 소조멘에 따르면, 니케아 공의회 직후 논쟁은 '호모우시오스'의 의미에 집중되었다. 일부는 이 용어가 몬타누스파나 사벨리우스파의 오류를 포함한다고 보았다. 에프스타티오스는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가 니케아 교리를 변경했다고 비난했고, 에우세비우스는 니케아 교리를 모두 인정한다면서 오히려 에프스타티오스가 사벨리우스주의에 빠졌다고 맞섰다.[9]
결국 에프스타티오스는 안티오키아 시노드에서 고발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해임되었다.[10] 안티오키아의 지지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무력 사용까지 고려했으나,[11] 에프스타티오스는 이를 만류하고 믿음을 지킬 것을 당부하며 추방길에 올랐다. 그는 트라키아의 트라야노폴리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했다. 사망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대략 337년경으로 추정되며, 370년까지 생존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2] 에프스타티오스가 해임된 후 에우세비우스파는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를 안티오키아 주교로 추천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
에프스타티오스 사후, 360년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우스가 안티오키아 주교가 되었지만, 에프스타티오스를 따르던 이들(에우스타티우스파)은 362년 알렉산드리아 시노드에서 멜레티우스의 선출이 승인된 후에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정통파 내부에 두 개의 분파가 생겨났는데, 이를 멜레티우스 분열이라 하며 5세기 초까지 이어졌다.[13] 안티오키아 분열은 에프스타티우스파(바울리누스 주교 계열)와 멜레티우스파 사이의 갈등으로 동방과 서방 교회를 모두 혼란스럽게 했다. 바실리우스와 사모사타의 에우세비우스 등 동방 주교들은 멜레티우스를 지지했고, 교황 다마수스와 서방 주교들은 바울리누스를 지지했다. 멜레티우스는 삼위일체의 세 위격을, 바울리누스는 한 위격을 강조했는데, 이는 각각 아리우스파와 사벨리우스파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었다.[14]
2. 4. 멜레티우스 분열
에우스타티우스가 사망한 후, 멜레티우스가 360년에 안티오키아의 주교로 선출되었지만, 에우스타티우스를 따르던 이들(에우스타티우스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362년 알렉산드리아 시노드에서 멜레티우스의 선출이 승인된 이후에도 에우스타티우스파는 그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13]
이러한 에우스타티우스파의 완고한 태도는 니케아 신경을 따르는 정통파 내부에 분열을 일으켰으며, 이는 '멜레티우스 분열'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분열은 5세기 20년대까지 이어졌다.[13] 당시 분열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에우스타티우스파, 즉 그들의 주교 파울리누스를 따르는 옛 가톨릭파와 성 멜레티우스를 따르는 새로운 가톨릭파 사이의 안티오키아 분열은 동방과 서방 교회 모두를 괴롭혔다. 성 바실이나 사모사타의 에우세비우스와 같은 동방의 주요 주교들은 멜레티우스를 지지했다. 반면, 교황 다마수스를 비롯한 서방 주교들은 파울리누스와 교류했다. 멜레티우스는 삼위일체에 세 위격(휘포스타시스)을 주장했고, 파울리누스는 하나를 주장했다. 다마수스는 멜레티우스의 주장이 아리우스파처럼 보일 것을 우려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바실은 파울리누스의 주장이 사벨리우스파처럼 보일 것을 우려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베드로는 비록 다마수스의 입장에 더 기울었지만, 양측 사이에서 일종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성 바실은 로마에 있는 그에게 이 문제에 대해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에서 그는 실제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서방 주교들이 멜레티우스와 에우세비우스를 아리우스파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 강한 어조로 불만을 표했다."[14]
3. 저작
그 외에 에프스타티오스의 저작으로 알려진 것들도 있지만, 진위가 확실하지 않다. 예를 들어, ''Allocutio ad Imperatoremlat''은 그의 작품이 아닐 가능성이 높으며,[2] 필사본에서 그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헥사메론 해설''(Commentary on the Hexameronlat) 역시 후대의 저작으로 여겨진다.
참조
[2]
EB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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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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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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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기타
[12]
웹사이트
Ecclesiastical History
http://www.ccel.org/[...]
[13]
웹사이트
Ott, Michael. "St. Eustathius." The Catholic Encycl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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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Appleton Company
2018-07-29
[1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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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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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Ορθόδοξος Συναξαριστής :: Άγιος Ευστάθιος Αρχιεπίσκοπος Αντιοχείας της Μεγάλη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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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HOLIC ENCYCLOPEDIA: St. Eustathius of Antio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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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Eustathius of Antioch
https://en.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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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 Eustathius of Antioch {{!}} Patriarch, Martyr, Miracle Worker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4-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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